해병정신 58

●청룡 투혼의 위대한 승리-푸옥록(phuoc loc) 30고지 전투( 7,8 )

★Marine Story★ ●청룡 투혼의 위대한 승리-푸옥록(phuoc loc) 30고지 전투( 7 ) 6. 베콩 라이 라이! 연이어 들리는 요란한 총성 틈틈이 적들의 고함소리와 무슨 타악기 소리 같은 소음도 들렸다. “따이한 라이 라이!” “따이한 라이 라이!” “따이한 라이 라이!” 똑 같은 큰 함성을 되어 되풀이 하였다 해병들은 숨을 죽이고 M1 소총에 착검을 하고 사격만 하고 있었다. 모두 다 전사한건 아닌가? 너무도 우군들이 조용하여 사람의 흔적을 알리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안 들리는 듯하였다. 이 때 느닷없이 선임하사 이영구 상사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 베콩 라이 라이” “ 베콩 라이 라이” 전 대원들 모두 모두 그 외침에 힘이 솟았다. “ 베콩 라이 라이” 라고 다 함께 소리치며..

해병정신 2021.01.16

●청룡 투혼의 위대한 승리-푸옥록(phuoc loc) 30고지 전투( 5,6 )

★Marine Story★ ●청룡 투혼의 위대한 승리-푸옥록(phuoc loc) 30고지 전투( 5 ) 4. 검은 묘비들 사이로 흔들리는 적들의 그림자들 무전기 2대가 함께 있는 경우 한 번의 수류탄 공격으로 파손되는 위험이 있어서 옆에 있던 2명과 함께 본부반에 떨어져서 합세하도록 하고, 나는 혼자서 무전기를 곁에 두고 사격을 유도하였다. 중대 본부반에 중대장과 가까이 있어야 했는데 그 위치에서는 전방 주시가 되지 않아 3소대장 쪽으로 약간 전진하였다. 빗물이 눈으로 들어가서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보면서 사격을 유도하다보니 비탈 전면에 있는 공동묘지 비석들이 여기 저기 많이 보였다. 바람이 불어 조명탄이 흔들흔들 하며 조명을 비추니 비석의 그림자도 같이 일렁대고 있어서 아주 혼란스러웠다. 더구나 조명탄..

해병정신 2021.01.16

●청룡 투혼의 위대한 승리-푸옥록(phuoc loc) 30고지 전투(3,4)

★Marine Story★ ●청룡 투혼의 위대한 승리-푸옥록(phuoc loc) 30고지 전투(3) 2. 최악의 지형 속으로 넓디넓은 들판 사이에서 적을 감지할 수 있는 30미터 정도의 작은 고지가 있었는데 . 중대장 김윤형대위는 3소대장 전창우 소위(해사19기),1소대장 김원식 소위(해사20기) 그리고 관측장교 김세창 중위(해간33기)와 작전회의를 하며 고심 끝에 연 3일을 같은 숙영지로 결정하였다. 아니 이곳 이외에서는 우기에 물이 고여서 숙영할 곳이 없었다. 우리가 숙영할 30고지는 유일한 지역이었고 최악의 여건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곳이기는 하나 참으로 위태롭고 취약한 진지였다 진지 진입 위계(僞計)를 하느라 1시간여를 북쪽 산자락에서 휴식 겸 장비정검을 하고 4시가 조금 지나 분대 단위로 분산해서..

해병정신 2021.01.16

●청룡 투혼의 위대한 승리-푸옥록(phuoc loc) 30고지 전투 1,2

★Marine Story★ ●청룡 투혼의 위대한 승리-푸옥록(phuoc loc) 30고지 전투 서 문 짜빈동 대첩의 화려한 명성으로 해병전사에서 그 빛이 묻혀버린 푸옥록의 전투는 이제 서서히 해병 모두에게서 잊혀히고 있습니다. 그 때의 용감한 전사들은 지금은 점차 찾아보기 힘들어 가고 있습니다. 투망작정에서 상당히 전사나 부상을 당하였고 그중에 전사한 소대장2명(전창우소위, 김진철 소위)과 당시 선임하사 이영구(7년 전에 병사)가 세상에 없는 처지이라서 안타깝습니다. 청룡9중대의 푸옥록30고지 전투는 반드시 후배 해병대원의 정신교육에 꼭 전수되어야 하고, 해병전사에 당당히 그 진정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용안작전의 1부분으로 취급되어 있으나 이 전투는 전사에서 독립적으로 부각시켜주어야 합당합니다. 그 ..

해병정신 2021.01.16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5]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5] ●월남전 당시 국가가 파월장병들의 전투근무수당을 삥땅치다. 미군이 국군에 자국군과 동일한 전투근무수당과 동일한 금액을 지급했는데 중간에서 국가가 90%를 가로챘다는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 월남전쟁 개요 1955~1975년까지 공산국가인 북월맹과 자유우방인 남월남간의 내전에 미국이 주변 라오스,캄보디아,태국 등으로의 도미노현상을 우려하고 있던차 1964년 8월 통킹만공해상에서 미국 군함이 북월맹의 공격을 받자 이를 빌미로 북월맹에 대한 보복폭격 등 본격적인 군사개입으로 확전된 전쟁임. 월남전은 자유월남정부와 미국의 요청으로 한국군과 태국, 오스트리아, 호주, 필립핀 등 연합군이 참전했으며 한국은 1964~1973년 8년6개월간 총 312,853명이 참전..

해병정신 2021.01.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3-1]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3-1] ●駐韓美軍 차출 막으려 파병, 경제성장의 종자돈 마련 국방예산의 72.4%를 美 원조로 충당 1960년대 중반 북한군의 능력은 한국군을 거의 압도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국방을 위해 투자할 경제력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고, 미국의 원조로 국방예산을 편성하고 있었다. 1960년대 초반 한국 정부 예산의 52%, 국방 예산의 72.4%가 미국의 원조로 충당되고 있었다. 駐韓美軍의 존재와 미국의 군사원조가 한국 방위의 모든 것이었다. 미국이 월남전이라는 진흙탕에 발을 담그기 시작하면서, 한국 정부는 「혹시 駐韓美軍이 월남으로 빠져나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느끼게 됐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1년 11월 케네디 美 ..

해병정신 2021.01.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 [23]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 [23] ●駐韓美軍 차출 막으려 파병, 경제성장의 종자돈 마련 軍 수뇌부와 시민들이 부산항에서 월남으로 파병되는 맹호부대 장병들을 환송하고 있다. 駐韓美軍 차출 막으려 파병, 경제성장의 종자돈 마련 월남 파병을 결정한 朴正熙 정부가 염두에 둔 두 가지 전략 목표가 있었다. 첫째는 파병을 통해 국가안보를 확실히 하고, 둘째는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는다는 것이었다. 월남 양민학살 주장은 게릴라戰이라는 월남전의 특징을 무시한 것 李春根 1952년 서울 출생. 연세大 정외과·同 대학원 졸업. 美 텍사스州立大 정치학 박사.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해양전략연구소 연구실장, 자유기업원 국제문제연구실장 역임. 現 자유기업원 부원장. 가나와 비견되던 대한민국 1960년대 초까지도..

해병정신 2021.01.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2]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2] ●베트남 파병을 통해 벌어들인 '50억 달러' 日本의 어느 대학에서 2년 전 경험했던 일이다. 實名을 밝힐 수는 없지만 한국인 A교수가 대학에 와서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을 주제로 講演을 가졌다. 그는 日本人들 앞에서 韓日회담을 통해 日本이 韓國에 제공한 對日청구자금 8억 달러(경제협력자금 포함)가 한국 경제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A 교수는 歷史의 절반만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경제를 만든 기초는 누가 뭐래도 朴正熙 대통령의 베트남 派兵이었다. 베트남 派兵은 朴대통령이 정치와 경제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美國이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제안을 한 것이었다. 이는 관계자 증언을 통해서도 나왔지만 베트남..

해병정신 2021.01.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 [21]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 [21] ●베트남 전쟁 참전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 1960년대를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 보면 후반 (1965-69년)의 연평균성장률은 11.8%로서 1960년대전반 (1960-64년)의 실질성장률은 5.5%의 두배를 넘는다. 한국경제의 기적은 1960년대부터가 아니라 1960년대후반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초기 발전전략은 성공하지 못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년)은 장면 정권의 계획을 답습한 것이었는데, 기간산업의 수입대체와 1차산품의 수출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발전전략은 인플레이션과 외환부족으로 곧 위기에 부딪쳤고, 한국경제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개입에 기초한 한일국교 재개와 베..

해병정신 2021.01.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 [21-1]

■월남파병 이야기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 [21-1] ●베트남 전쟁 참전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 1960년대 후반 미국은 Buy American정책에 의해 필요한 물자를 미국 본국에서 조달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공동파병국에서 구매한다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1960년대말 국제수지 대책, 달러방위 대책 차원에서 국방비에 의한 구매를 극력 미국 국내에서 행하고 그 해외유출을 극력 억제했다. 즉 미국정부는 대외군사지출에 의한 달러 유출을 억제하기 위해 군사지출 상대국에 대해 미국으로부터 무기 등의 구입을 요구하고 대외군사지출액의 미국으로의 환류를 도모했다. (예컨대 ‘국제수지에 관한 존슨대통령의 메시지’ 1968.1.1.) 그러나 한국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연 31만..

해병정신 2021.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