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정신 58

Motto(Once a Marine, always a Marine)"한번 해병은 영원히 해병"

Motto(Once a Marine, always a Marine)"한번 해병은 영원히 해병" [1] 이 Motto(Once a Marine, always a Marine)는 어떤 구호가 아니라 모든 해병, 특히 오늘의 해병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변화이며 또한 해병대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지표이기도 하다. 또한 이 Motto는 우리의 형제해병대인 미국 해병대로부터 한국전쟁 중 한국 해병대와 함께 전투를 한데에서 유래되었지만 지금은 우리 한국 해병대의 고유 Motto로 정착되어 있다. 해병대의 자랑이었고 우리의 자부심이었던 해병대 군복을 국가예산의 절약이라는 허구한 미명하에 우리의 젊은 시절을 헌신과 희생으로 지켜왔던 그 국가가, 박정희 정권이 우리들의 삶의 목표였고, 보람이 었고, 또한 삶의 터전이었..

해병정신 2021.01.02

"개병대(DMC)"라는 어휘의 유래를 확실히 알자

Marine story "개병대(DMC)"라는 어휘의 유래를 확실히 알자 그 호칭의 유래에 대하여 해병대의 선배의 일원으로서 설명하고져 한다. 역사인식은 올바르게 하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과 같은 혼란 속에 서로 빠지게 되기 쉽기 때문에 확실히 하기 위하여 다시 설명하는 바이다. "개병대"라는 뜻은 Dog Marine Corps로서 통상 'DMC'라고 불렀고 우리는 그렇게 불리우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개(犬)"라는 뜻은 주인에게 충실하고 또 그 주인을 잊지 않는다는 의리를 지키는 忠犬의 상징임을 알고 이 글을 읽기를 바라며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도솔산 전투" 후에 無敵海兵이라는 휘호를 남겼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한국전쟁 중 해병대에게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은 전투에 이기는 것이었다. 육군과 달리..

해병정신 2021.01.02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6]

■Marine story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6] 이 작전은 결과적으로 미 제10군단이 성공적으로 1950년 '흥남'철수를 실시할 수 있도록 결정적으로 중요한 산악통로를 개통시켰다. 특히 "장진호 전투"에서 Cohen 군목(대위)은 장교들이 중공군과의 격전 중에 전부 쓸어진 것을 보고 행정요원들을 모아 마지막 역습 돌격을 감행하여 중공군에게 점령된 고지를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미 해병 제1사단은 결사적으로 포위 추격하는 중공군과 매서운 추위(낮에는 -20도 밤에는 -32도), 그리고 엄혹한 굶주림 속에서 상당수의 대원을 잃고 간신히 '흥남'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100.000여 명의 북한 피난민들과 함께 '흥남'부두에서 미 해군의 함정과 선박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철수..

해병정신 2021.01.02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5]

■Marine story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5] 28일 02시 30분, 약 1개 중대의 중공군이 갑자기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하면서 북, 서, 남 등 세 방향에서 F중대를 공격해 왔다. 북방으로부터 능선을 따라서 돌격해 온 중공군 때문에 북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던 약 2개 분대의 해병들은 어느 사이에 많은 사상자(35명중 27명)를 내고 후방 돌출부에 위치하고 있던 2선 분대지역으로 철수함으로써 고지 정상은 중공군에 의해서 점령되고 말았다. 이 공격과 동시에 중공군은 서측방과 서북방으로부터도 돌격해 왔다. 이때 2소대의 '카페라다' 일등병은 얼어서 마비된 발을 문지르려고 침낭 안에서 신을 벗고 있었는데, 중공군의 돌격 소리를 듣고 양말 바람으로 뛰어나와 호 속에 우뚝..

해병정신 2021.01.02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4]

■Marine story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4] "F중대의 혈전" 세계의 2대동기 전투의 하나인 "장진호(長津湖 Chosin Reservoir)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미 해병 제1사단제7연대제2대대 F중대가 중공군의 대병력의 포위 속에서의 혈투상황을 소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음. 1950년 11월 26일∼12월 2일 간 함흥북방 55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장진호(長津湖)'지역일대의 영하 -30도(C)가 되는 혹한의 산악지대(1,500~1,600m의 눈 덮힌 산악지형)에서 미 해병 제1사단제7연대제2대대 F중대가 6박5일 간 중공군(제59사단 예하부대)에 포위되어 감행된 혈투상황. Capt. William E. Barber 1. 상황 중공군 제9병단 예하 8개 사단(약 ..

해병정신 2021.01.02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3]

■Marine story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3] 6. 한국 해병대(K.M.C.)의 혈맹 형제해병대, 미 해병대(Brother Marine U.S.M.C.) 우리는 형제 해병대(Brother Marine이라고 한국전쟁 중 우리는 서로 이렇게 불렀음)인 미 해병 제1사단의 한국전쟁 중의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한 희생이 어떠하였음을 이 내용에 수록되어 있는 사진들을 통하여 다시 깨달아야 한다. 또한 이들이 본일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이국땅, 한국에서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공산침략군에 대항하여 우리와 함께 싸운 결과가 오늘의 한국이 있게 되었음을 우리는 한시라도 잊지 말고 항상 감사할줄 알아야 한다. 특히 우리, 해병대는 한국전쟁 중 대부분의 전투기간을 미 해병대와 함께, 미 해병..

해병정신 2021.01.02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2]

■Marine story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2] 4. 전투현황 미 해병 제1사단의 "장진호 전투"의 전투일지 중공군은 미 해병 2개 연대에 대하여 4개 사단을 투입하여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하갈우리'로부터의 미군 철수로 주변일대에 종전의 4개사단에 추가하여 5개사단을 투입했다. 또한 중공군은 '하갈우리', '고토리', 및 '진흥리' 도로상에, 주요 교량을 폭파하고 장애물을 설치하여 미 해병 제1사단의 철수에 치명타를 입힐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1) 미 해병 제1사단장(오리버 P. 스미스 소장)의 결의 이에 대하여 UN군측에서는 극동군 수송 사령관 '터너'(William H. Tunner) 장군이 해병 제1사단장을 방문하여 "모든 장비를 버리..

해병정신 2021.01.02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1]

■Marine story ● 미해병 제1사단과 "장진호(長津湖) 전투"[1] 이 글은 이 blog의 독자, 특히 해병가족들(현역장병)에게 한국전쟁 중 가장 어려웠던, 지역적으로 오지에 위치하여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미 해병 제1사단의 동계작전인 "장진호 전투"를 소개하므로서 오늘의 해병들의 전투정신을 보다 강하게, 보다 철저하게 함양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보조자료를 제공하는 데 이 내용의 목적이 있다. 또한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대부대에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 속에 있던 제2대대의 F 중대를 직접 병력을 인솔하여 구출한 제1대대장 데이비스 중령(Lt. Col. Raymond G. Davis)의 용감하고 탁월한 전투지휘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1개중대의 병력으로 1.000여 명의 중공군에..

해병정신 2021.01.02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20] 끝.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20] 20. 나의 모든 노력은 해병대를 위함이 었다. 나는 남보다 앞서기 위해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했다. 해병대 장교 중 도미 유학도 제일 많이 했다. 미국 해병대의 Basic School(1954년). Junior School(1963-4년). 미국 육군 특수전학교(1961년).그리고 우리 해병대에서 최초로 미국 육군 지휘 및 참모 대학(U.S.Army Command & General Staff College) 정규과정(1968-9년)을 졸업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다른 장교들이 하지못한 일도 해냈다. (1) 1961년 5월 나는 결혼일을 2주일 앞두고 해병대에서 처음 가는 미 육군 특수전 학교에 특수훈련이라 해서 입교희망자가 없어서 도미유학시험에 응시도 ..

해병정신 2020.11.01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19]

해병대 비운의 날(1973년10월10일) [19] 17. 공정성이 요구되는 인사정책 나는 이런 장차 예상되는 대립과 마찰에 대해서 그 당시 해병대 사령부 참모장(김두찬 준장)에게 해병학교 사관후보생 중대장(당시 소령)을 하면서 해병학교로 의탁교육 온 해군 사관학교 생도들의 행태를 관찰한 결과와 미국 해병학교에서의 이들의 언동 등을 보고하고 이의 시정을 건의 한 사실이 있다. 그런데 참모장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고만 있었다. 아마 귀여운 생각이 들어서 였을 것으로 나는 그의 웃음을 보면서 느꼈고 동시에 그의 표정을 통하여 별수 없구나 하고 실망했다. 이런 중요한 인사 정책의 변화는 당시 해병대 수뇌부의 결정이었는데 그들은 그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있었다. 그것은 해병학교출신과 해군 사관학교출신 ..

해병정신 2020.11.01